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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세종인

한겨레신문 출판사진부장 강재훈(화학, 79) 동문 인터뷰 기사

관리자 2010.06.21 10:00 조회 63937



작은 구멍 속 세상

 작은 구멍-또는 조리개라 했던가-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난다.
그가 이 큰 세상에서 잘라온 -시간도 오리고 공간도 오리고 -작은 세계인데, 누가 봐도 가슴이 찡하다. 애잔하든가, 소소하든가, 쓸쓸하든가, 그립든가, 안타깝든가, 가고 싶든가…. 그래서 괜히 그 시절을 떠올리고 순해지고 싶어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강재훈. 41세, 한겨레 출판사진부장. 그는 알고 있었다. 과거를 빠져나오지 않고 늘 그 시절 주인공으로 남으려는 인간의 모순된 감정을. 늘 그립기만 한 우리의 과거 이미지를 그가 현실로 데리고 온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흑장밋빛 할미꽃이 산소 가에 핀다는 얘기를 듣고 할미꽃으로 가던 손길이 주춤했던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도 할미꽃을 바라볼 수 있던 시절이 눈물겹게 그립다는 것을요.” 그는 분교를 통해 할미꽃도 만나고 아이들 웃음소리도 만나는 것이다.


두 갈래 길 앞에서

 사실 그는 화학을 전공했더랬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화두(?) 하나를 갖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제대하고 4학년에 복학한 어느 봄이었다. ‘평생 그 길을 간다 해도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에 죽기 살기로 고민을 하고 매달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두려웠다. 새삼 전공을 논하기에는 벌써 이만큼 달려왔지 않은가.

 그러나 그 점에서 그는 남들과 달랐다.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것. 결심을 했다. 자퇴원을 내기로. 자신 없는 삶, 후회할 것 같은 그 길을 느꼈을 때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 새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실은 운명의 여신도 그를 부추겼다. 필연처럼 등장하는 여자-대학 후배며, 지금의 아내-는 소설의 한 장면처럼 시집 한 권을 들고 찾아와 격려해 주었다. 그 시집이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라고 기억하고 있다. 다행인지 대학원을 홍대 산업미술 사진전공으로 정하는 바람에 자퇴원도 철회하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지금 사진을 하다가 다소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참고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요.”

 그가 돌아간 길은 그에게 활력을 불러준 충만된 길이었다. 자신감이 생기고 상상력에 탄력이 붙었다. 훌륭한 사진기자가 되고 싶었다.





첫만남

 광릉수목원과 광릉이 있는 서울 북부의 자연 경관이 수려한 마을.
지금은 광능내로 불리운다는 그곳이 그가 어린 시절 뛰놀았던 주무대다. 1960년대 광능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깊은 산골이었다는데, 초등학교에 가기 전 애기 때부터 농사일을 돕는 시늉을 하고 ,땔나무 짐도 지고, 수목원 산림녹화를 위해 나무도 심는가 하면, 물고기도 잡으며 종횡무진 산으로 들판으로 개울로 뛰어다니며 맘껏 놀이에 열중했다. 자연스레 정서는 풍부해졌으며 심미안도 자라날 터를 잡았다. 예술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 인간의 본질적 슬픔도 이해했다.

 그가 태어나던 해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산소는 광능내에 있어 성묘 때 쉽게 따라가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설핏 슬픔이 느껴지며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피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친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된다. 그의 모친도 용기백배한 여성이었는지 땅은 그대로 두고 집은 덜렁 팔아 거금(?) 8만 5,000원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자식들을 위하여…. 그리곤 당연히 고생을 벗삼아 살아오셨다. 노점을 하며 교육을 시켜주신 어머니의 희생을 보며 자란 아들은 진실한 아들이 되고자 마음먹게 된다.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아 사진을 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막 장가들어온 매형이 대학 시절 취미활동으로 쓰던 카메라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게 사진과의 첫 만남이지요.”
늘 시작은 미미하고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쓸 수 있는, 망가지지 않은 손때 묻은 카메라를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것도 그 시절에. 그리고 이왕 받으려면 중고교 시절이 꼭 알맞다. 귀중한 것도 알고 취미란에 뭔가 새로운 것을 적어보고 싶은 나이. 인생에 이성 외에도 감흥을 일으키는 미적 대상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나이. 취미란에 ‘연애’라고 쓰는 학생이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는 아니었다. 서울사대부고에 들어가서 특별활동은 당당히 사진이었고. 그리고 어우러진 그의 정서가 세종대학 화학과에 가서도 사진 동아리(해바라기 사진연구회)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


들꽃 피는 학교, 들꽃 닮은 아이들

 어느 누구 하나도 잊을 수 없다.
“혜영이는 상 받아서 좋겠구나. 엄마가 예쁘다고 상 주실지도 모르겠네. 혜영이는 무슨 선물 받고 싶지?” 선생님이 다정히 묻는다.
“고구마 많이 달라고 할 거예요.”
“고구마를?…”
“네, 학교에 많이 가지고 와서 언니, 오빠, 동생들하고 구워 먹게요.”
아침에 학교에서 장작난로를 피우고 나면 아이들은 감자, 고구마를 하나씩 꺼내 난로에 구워먹는데, 늘 모자라 열심히 구운 하나를 가지고 두세 명이 나누어 먹어야 했다.
‘그 맛있는 것을 하나씩 먹으면 좀 좋을까?’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아주 귀여운 아이, 혜영이의 생각이다. 경기도 양평군 중미산 중턱의 명달분교의 전교생 이래봤자 모두 7명이었는데  그곳의 아이는 벌써 나누는 기쁨을 아는 듯했다.

“명달분교 친구들은 아침마다 숲속 오솔길을 따라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서 학교에 갑니다. 친구들과 신나게 발맞춰 학교 가는 길은 언제나 소풍 길이지요.” 하지만 명달분교도 금년 우중이와 진선이의 졸업식을 끝으로 학교 문을 닫았다.

 영원히 ‘선생님’으로 남고 싶다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꽃처럼 환하게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저 아이들이 내 가슴에 담겨지면 나도 꽃이 되리”라고 말하며, 자연 속 아이들의 화려한 풍경을 지워가는 교육정책에 대해 분개했다고 하는데, 강재훈, 그도 마찬가지다. ‘산이 깊어도 산 깊은 줄 모르고, 뱃길이 멀어도 갈매기 소리에 외로운 줄 모르는 그 아이들만의 이야기를 사진 작업으로 남기기로 마음먹고 산골 오지로 돌아다닌 것이다.




자연을 사랑할 줄 안다면

 그는 1998년 ‘분교- 들꽃 피는 학교’라는 사진전과 사진집을 냈다. 2000년에는 동화 그림책 ‘작은 학교 이야기’도 냈고.  ‘2000년 사진기자상’도 탔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선물로 받았다.
“아빠, 산골 학교 갈 거지요? 나, 3,000원만 주세요.” “왜?” “초코파이와 요구르트 사려구요.”
그의 아이들 현구와 나정이는 분교를 좋아하고 산골의 형과 누나와 나눠먹고 싶어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데리고 다녔더니 어부지리로 화장실 등 불편한 시골생활을 마다않고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되어간다. 나눠 먹을 줄 알고 자연을 사랑할 줄 안다면, 성숙한 인간으로의 길로 저절로 인도된 셈이다. 6년 간 연애 끝에 결혼한 그의 아내 김인옥 씨 힘도 컸다. 밤이고 새벽이고 아이들을 챙겨 따라 나서더니, 이젠 아예 아이를 매학기 교환 학생으로 산골 분교로 보내 함께 공부하게 하는가 하면 아빠 없이도 세 식구가 씩씩하게 살며 아빠를 초대하기까지 한다.

 그가 졸업식에 찾아가고 장학금을 전달하고 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이뤄내는 생활 자체에서 산골 분교에서나 날 듯한 가을 하늘 같은, 겨울 고드름 같은, 봄볕 받은 장독 같은 향기가 나며 공연히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작은 구멍-또는 조리개라 했던가-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난다.
그가 이 큰 세상에서 잘라온 -시간도 오리고 공간도 오리고 -작은 세계인데, 누가 봐도 가슴이 찡하다. 애잔하든가, 소소하든가, 쓸쓸하든가, 그립든가, 안타깝든가, 가고 싶든가…. 그래서 괜히 그 시절을 떠올리고 순해지고 싶어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 아산사회복지재단 "아산의 향기" 신년호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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